::: 전혁림미술관 :::

Korean  I  English

Coffee shop JMA

on the second floor


경향신문 보도자료 05.03.12 16:31
미술관 HIT 1058
경향신문 >기획 >기획일반     [나의生 나의藝] 13. 화가 전혁림

전혁림은 한국화단에서 유별난 존재이다. 그는 일제 강점기인 1915년 저 멀리 남해안의 통영에서 태어나 줄곧 통영과 인근에 살면서 당당하게 예술가로 우뚝 선 화가다. 근대기 이래 ‘예술’이란 이미 그 자체가 하나의 중심, 즉 예술계라는 또 하나의 세계를 전제로 해서만 성립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는 그 유례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경우다.

전혁림은 타고난 화가다. ‘예술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라는 낭만주의적인 예술론에 의구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더라도 그의 경우에는 이의를 제기하기 어렵다. 그는 미술학교를 다닌 적도, 누군가에게 사사한 적도 없다. 그가 다닌 학교라고는 통영보통학교와 수산학교가 전부다. 그리고 졸업하자마자 지금의 국민은행 전신인 진남(鎭南)금융조합에 다녔다. 도무지 화가로서의 도정과는 연결지어 생각할 수 없는 경력이다.

다만 그에게 ‘예술’이라는 문명의 메신저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지방 구석구석까지 전파될 수 있었던 인쇄물들이었다. 토마스만·헤세·칸트·헤겔 등의 일본판 문학과 철학서를 탐독했던 어린 시절부터 미술 잡지 ‘미즈에’ 등 예술 관련잡지를 구독했던 지난날을 떠올리며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결국, 사실 내 정신의 형성은 프린트 문화 덕택입니다. 서적문화!” 덧붙여 그의 화가의 길에 보탬이 된 주변이 있다면, 미술교사는 아니지만 그림을 좋아했던 가와시마 도시야스(樺島年安)라는 수산학교 시절의 선생이다. 전혁림은 그와 더불어 그림 그리기를 즐겼다. 강습회 강사였던 도고 세이지(東鄕靑兒)와의 우연한 만남도 그의 예술인생에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생래적인 화가기질은 금융조합 재직시 온 신경을 그림 그리는 데 쏟았다는 데서 잘 확인된다. 본격적으로 수채화·유화에 몰입한 것은 바로 그 시절이다. 그는 은행업무를 제쳐두고 부산에 나가 ‘이과회 하기 양화 강습회’를 수강하는 등 그림에 정신을 팔았다.

화가로서의 데뷔는 36년 가을에 열린 ‘부산미술전람회’에 출품하면서부터다. 이 전람회는 부산일보사가 주최한 공모 형식의 전람회로 ‘조선미술전람회’의 고답적인 성향과는 매우 다른 성격이었다. 그는 당시 화가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상식에 가까웠던 ‘조선미술전람회’는 한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속박과 억압을 못 견뎌하는 화가로서의 전혁림의 면모를 읽게 해주는 국면이다.

전혁림의 그림에 대한 열정 앞에서는 어떠한 권위도 권력도 덧없는 것이었다. 해방 후 만들어진 제1회 ‘국전’ 입선에 이어 제2회에 지방 작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문교부장관상 수상이라는 화려한 경력을 갖게 되었지만, 그는 관전 특유의 아카데미즘을 못 견뎌하며 ‘국전’도 철저히 외면해버렸다.

“‘국전’에 참가하는 작가들, 뭐, 다 고리타분한 그림들을 그리고, 내가 그 사람들하고 어울려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내가 결별을 했지.” 그렇지만 화단 현실에서 ‘국전’과의 결별이란 다름 아니라 화단권력, 중앙, 새로운 유행과의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이일 저일을 전전해야 하는 고난에 찬 삶을 감내해야 했다.

이같은 전혁림의 태도는 한국 화단을 늘 주기적으로 휩쓸고 지나가는 일련의 유행의 물결에서 한발 비켜서게 했다. 그리고 그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구축하게 했다. 예컨대 구상과 추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보여주는 광활한 표현영역, 대한도자기 회사를 다니며 그가 펼쳐간 도기화, 입체 오브제 작업 같은 것들은 도대체 한국 미술의 일반적인 흐름에서 보면 터무니없이 일탈적인 것이다.

더군다나 70년대 이후에는 구체적 이미지로 짜여진 조직적 화면을 구사했다. 80년대는 반추상 경향에서 컬러풀한 평면화의 경향을 보여주었다. 당시 중앙화단의 획일적이고 집단적인 백색 단색화나 민중미술, 혹은 리얼리즘 미술 등의 동시대적 경향을 오히려 무색하게 했다.

통영에서 여러 차례의 구술채록을 마친 지 석 달 만에 수원의 이영미술관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바람이 몰아치고 빗방울이 흩날리던 지난날, 박생광 탄생 100주기 기념전 개막식에 참석코자 멀리 통영에서 5시간 가까이 차를 타고 올라온 것이다. 무녀 김금화의 박생광 화백 추모굿판 등 개막행사가 초저녁에 시작하여 밤 9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그 긴 시간들을 그는 꼼짝 않고 자리를 지켰다. 그리고는 내쳐 밤새워 다시 통영으로 내려가리라며 자리를 떴다.

90수의 나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평생 끊임없이 자기갱신을 거듭하며 살아온 그가 또다시 찾는 세계는 어디일까. 그는 최근 자연과 민화적 소재를 기하학적인 조형요소로 단순화시킨 벽화 같은 대작들을 제작하고 있다.

전혁림의 삶은 속된 예술계를 떠날 때 비로소 예술이 성립하게 된다는 것, 세속적 권력이나 중심을 벗어나서야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그러한 그의 삶은 중심·권력의 편에서 보면 결코 쉽게 읽힐 수 없는 세계다. 그런 점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원장 현기영)이 2003년도부터 시작한 ‘한국근현대예술사 구술채록사업’이 미덕을 발휘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대상이다. 적어도 구술사(oral history)가 기존 문헌 중심의 연구와는 달리 복권되어야 할 여러 역사적 경험들을 당당하게 불러내는 미덕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김주원 상명대학교 강사 미술비평가〉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JY

 

Copyright ⓒ 2005 The Jeon hyuck lim Museum of Art.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