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혁림미술관 :::

Korean  I  English

Coffee shop JMA

on the second floor


연합르페르 06.05.07 1:03
미술관 HIT 1822
1234.jpg (242.0 KB) DOWN 50


[TRAVEL FEATURE]통영① 쪽빛 바다, 잠자는 예술혼을 깨우다 

[연합뉴스   2006-05-03 13:42:19]
http://www.repere.co.kr/services/2344000000.html

(연합르페르)
우리 땅 남단에 자리한 통영은 한눈에 그 윤곽을 더듬어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첫 만남에선 다도해에 흩뿌려진 섬들이 빚어내는 순연한 풍광이, 두 번째 만남에선 바다가 건네주는 성찬이 즐겁다. 반짝이는 물결에 눈을 씻고, 기갈을 풀고 나면 수면에 달빛 스미듯 감성이 피어오른다.


예술계의 별들, 통영으로 모여들다

예향(藝鄕)은 통영의 별호이다. 시원의 풍경이 펼쳐지고, 우주의 소리가 들리는 그곳에선 누구나 시인이 되고 화가가 되고 음악가가 된다. 세파에 파묻혀 심장이 굳어버린 사람이라 해도 그 바닷가에 서면 시심과 악상이 절로 일어난다. 아마도 이곳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어떤 강성한 힘이 내재하는가보다.

전혁림(全爀林) 화백은 1916년 통영에서 태어나 지금껏 통영에서 살았다. 백발이 성성한 그는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꼿꼿하게 앉아 물감을 찍어 화폭에 옮긴다. 망백(望百)이 지났지만 손 떨림도 없고, 안경도 쓰지 않았다. 붓을 내려놓는 시간엔 전혁림미술관 뜰에서 꽃을 돌보는데, 동백과 모란을 유달리 좋아한다.

전혁림미술관에 들어서면 빛바랜 흑백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온다. 녹음이 짙은 숲 속 양지바른 곳에 양복을 갖춰 입고 정렬한 일군의 사내들. 앞줄은 풀숲에 앉고 뒷줄은 서 있다. 햇볕이 센 날이었는지 몇몇은 중절모를 벗지 않은 채 눈 밑까지 그늘을 드리웠다.

낡은 사진의 주인공들은 1945년 가을 결성된 통영문화협회 회원들이다. 사진 중앙엔 당시 통영여고 국어교사이던 유치환(柳致環.1908-1967))이 두 팔을 무릎에 올린 채 가부좌하고 있고, 그 왼쪽엔 말쑥한 차림새로 카메라를 뚫어지게 응시하는 전혁림이 보인다. 뒷줄엔 바닷물에서 막 건져 올린 미역처럼 앳된 얼굴의 김춘수(金春洙.1922-2004)와 양손을 앞으로 모은 작은 체구의 윤이상(尹伊桑.1917-1995)이 눈에 띈다.

청마 유치환은 가장 연장자라는 이유로 협회 대표직을 맡았다. 그리고 현재 청마거리로 지정된 통영중앙우체국 인근에 사무실을 마련한다. 아내 권재순이 운영하던 충무교회 내 문화유치원 부근이었다. 당시 사무실 건물은 헐리었지만, 지금도 청마거리를 찾아가면 중앙우체국과 충무교회 사이에 위치했던 자리를 볼 수 있다.

전혁림은 이제 막 30대에 들어선 나이였다. 일본을 거쳐 수입돼 들어오는 서구 사조의 피상적인 이해와 인식에 한계를 느껴 혼란과 방황을 겪던 시기였다. 그는 민화와 산수화 등 우리 것으로 관심의 방향을 돌려 자신의 세계를 형성하고자 했다. 김춘수의 회고담에 따르면 "그렇게 가냘픈 육신과 섬세하고 민감한 신경을 가졌으면서도 아주 왕성한 탐구욕을 한편에 지녔었다"고 한다. 한국적인 미의식, 색채, 형상, 생활문화에 바탕을 두고 명확한 선과 조형성을 추구하는 '색채와 형상에 의한 공간창조'의 서막은 이미 그때 열리고 있었다. 전 화백은 60년 전 일을 소상히 기억했다.

"회원들 대부분이 소지주이거나 어장을 가진 부잣집 아들들이었어. 일본에 유학도 다녀왔고 여유도 있겠다, 다들 열심히 활동했지. 일이나 회의가 끝나면 남망산 아래 금광 광부들한테 술 파는 할매 집으로 몰려가 막걸리를 마시곤 했어. 술값은 내가 도맡아냈지."

통영에서 알아주던 선비집안의 자제인 윤이상은 1944년 반일활동으로 인해 치른 옥고와 폐결핵으로 망가진 몸을 고향에 내려와 추스르던 중이었다. 한 살 차이인 전혁림과 곧잘 어울려 지냈는데, 그것이 협회에 가입하는 계기가 됐다. 특이한 것은 음악가이면서 부산 국제신보에 소설을 연재했다는 사실이다. 분야를 아우르는 그의 예술적 재능은 후에 서양의 음악기법에 동양사상을 결합시킨 형태로 구현된다.

당시 갓 스물을 넘긴 김춘수는 협회 실무를 주관하는 총무였다. 그는 가장 젊었고, 혈기에 넘쳐 있었다. 매주 '민족문화의 밤'이란 거창한 제목을 내걸고 벌인 행사를 위해 하루 이틀 밤샘은 예사였다. 바다가 육지를 파고들어 오목한 강구안 포구는 늘 사람들로 북적여 그의 주무대가 되었다.

통영문화협회는 문학강연, 미술전시회, 한글강습회 등을 열었다. 전통무용을 발굴해 공연했고, 극단을 만들어 창작극과 번안극을 무대에 올렸다. 마산, 진주 등 이웃 도시까지 순회공연도 나갔다. 해방된 조국의 고향에서 '문화운동을 통한 민족정신의 앙양'이라는 슬로건을 저마다 가슴에 품고 있었다.

협회활동은 그러나 채 3년을 넘기지 못했다. 해산을 가져온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회원들 각자가 직업을 찾아, 또는 유학길에 나서면서 하나 둘 통영을 떠났다. 누구는 서울로 가고, 또 누구는 부산으로 향했다.

회원들의 이후 생애에 대해선 이미 세상에 알려진바 그대로다. 국회의원이 된 이도 있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간첩단 조작사건의 주인공도 나왔다. 아슬아슬한 로맨스로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인물도 있었다. 통영에서의 활동이 겨자씨처럼 작고 미약했다면, 협회 해산 이후 그들의 삶은 큰 나무가 어떻게 자라나는지를 보여주었다. 일거수일투족이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사후에도 주목을 받았다.

거목은 하나 둘 시간 속으로 사라져가고 있지만, 예향 통영의 본질은 여전히 그대로다. 주민들이 뽑은 통영시장의 면면을 봐도 예술과 문화에 대한 통영 사람들의 지향이 퇴색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전(前) 시장은 시인이자 수필가이고, 현(現) 시장은 통영 미술협회 소속이다. 통영에서 나고 자란 이는 어느 분야에서 일하건 예술가적 기질을 드러낸다. 이름은 바꿔도 본향은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사진/이진욱 기자(cityboy@yna.co.kr), 글/장성배 기자(up@yna.co.kr)

(대한민국 여행정보의 중심 연합르페르, Yonhap Repere)

(끝)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JY

 

Copyright ⓒ 2005 The Jeon hyuck lim Museum of Art. All rights reserved.